기복신앙, 무엇이 문제인가

매일종교신문 / <이승주의 성경 핵심 난제 연구>에서 옮김


목사들의 설교는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성공한다’는 것이 주종을 이룬다. 성도들의 간증도 ‘예수 믿고 병 나았다’ ‘예수 믿고 사업 번창했다’ ‘예수 믿고 돈 많이 벌었다’는 것이 주류다. 교회 전도지나 차량에는 으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성구가 들어가고, 선교 피켓에도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가 내걸리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는 목적이 마치 세속적인 복이나 받는 것처럼 돼 버렸고, 예수를 ‘소원을 이뤄주는 요정’ 쯤으로 인식하고 있는듯 하다.

헌금 갹출 위해 기복신앙 강조
이러한 현상은 한국 기독교(개신교)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존재하지 못하고 기복적으로 흐르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기복 현상이 좀 더 왜곡되면 하나님이 아닌 우상으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 국민일보는 과거 종교면에 “금전, 건강, 애정 등 인간사의 애환을 가지고 점집을 찾는 기독교인이 적지 않다”고 꼬집은 바 있다. 이런 기복 행태는 기독교 교리에도 위배되고, 기독교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이 된다. 이를 두고 어느 학자는 “한국교회가 교파 중심으로 교회의 양적 성장에 매달린 결과, 한국사회에 만연한 물신숭배사상에 기여했다”고 혹평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고,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을 용납하지 말라’(신 10:11)고 경고했다.

기독교의 기복신앙은 종교 전반의 기복 형태와 맞물려 종종 언론의 도마에 오른다. 교단에서는 기독교가 기복의 종교가 아니라고 항변할 지 모르지만, 현실은 ‘기복신앙을 배제하면 기독교가 유지 될 수 있는가’라는 현실적인 물음과 ‘기독교 본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교리적 논란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다. 오히려 헌금을 많이 걷기 위해 교계 지도자들이 기복을 부추기는 사례가 적지 않다. 목회자 상당수는 ‘헌금하는 것이 곧 투자’임을 강조한다. 헌금하면 더 많은 물질을 보상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세금 종류보다 한국교회의 헌금 종류가 더 많다는 우스갯소리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개신교의 비대화는 기복헌금이 밑거름이 됐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이다. 이것은 예수의 계명에 잘 나타나 있다. 먼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음은 이웃을 사랑하라(마 12:30~31)는 계명이다. 즉, 하나님과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해야 한다(약 2:8)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요일 5:2~3)이 된다. 예수는 이를 지켜야 살고(눅 10:28),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마 7:21)고 규정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겠다”(출 20:6)고 말씀했다. 레위기 (26:3~46)에는 계명을 지키면 받을 복과 지키지 않을 시 받을 벌을 명시하고 있다. 불교의 핵심사상도 자비다. 자비는 무한이며 무상(無償)의 애정이라고 한다. 기독교의 이웃사랑과 다르지 않다.

복을 받고자 하는 욕망은 잘 못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어떤 원칙이 있는 것이지, 무조건 구해서 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짓는 것’이라고 한다. 원인에 의해 결과가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법칙이다. 이 자연 법칙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된다. 누구나 심는 대로 거둔다는 뜻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과성(因果性)을 주장한다. 즉,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가,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가 생긴다고 말한다. 바른 마음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여 선행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창조주 하나님도 당신이 세운 이런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창 6:6). 노력을 하지 않거나, 안 될 일을 하면서 물질, 건강, 권력, 명예 등 세상적이요 정욕적인 것들을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은 하나님을 괴롭히는 것이 된다(약 3:15). 이런 경우 하나님이 들어준다면 이는 의타심을 길러주어 나약한 사람이 되게 하고, 그릇된 사람이 되게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출 33:19)이다. 진실 되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祈福에는 원칙이…아니면, 파멸 초래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로봇으로 지은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창 2:17), 만물을 주며 행복된 삶을 살도록 축복했다(창 1:30). 그러나 마귀는 사람을 유혹하여 파멸의 나락으로 끌고 갔고(창 3:5), 이 세상을 주관하는 임금이 되어(고후 4:4) 지금도 사람을 파괴적인 방향으로 떼밀고 있다(마 3:39).

사람의 불행의 근원은 대부분 자신의 욕망을 조절하지 못함에 있다. 욕망은 물질이나 권력, 쾌락 등 외면적인 것들을 지향하고, 만족할 줄을 모른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런 말을 했다. “육체의 욕망, 교만, 욕심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악덕이다. 이것 때문에 갖가지 불행이 인류의 어깨를 짓누른다. 이것을 고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곧 절제와 극기이다.”

성경은 ‘육체적 욕망이 사단의 사자’(고후 12:7)라고 규정하고, 세상적이요 정욕적인 지혜를 멀리하라(약 3:15)고 조언한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고전 3:19)이므로 이 세상 것들을 탐하지 말고 세상 밖으로 나가라(고전 5:10)고 권면한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져서(마 13:22) 육신과 재물에 속하면 죄 아래 팔리고 만다(롬 7:14).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마 4:4)고 일러준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 기독교의 기복신앙이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예수의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마 7:7)라는 말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며 낙심하지 말라’고 위로한 다음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겠느냐’(눅 18:1~8),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고 역설했다. 이런 말씀은 누구나 ‘끈질기게 구하면’ 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무조건 달라고 ‘떼를 쓰는 신앙’에 빠져들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조차도 ‘십자가의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구(마 16:39)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구하는 데는 어떤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성서를 상고하면, 예수도 ‘구하라’는 말만 하지는 않았다. 구하기 전에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도 명확히 밝혀 놨다. ‘나와 말씀과 하나 되어야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다’(요 15:7),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힘쓰라’(엡 6:18)고 강조한 것이다. 예수가 ‘구하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마 6:25~33),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고전 10:24)을 구하며, ‘공의와 겸손’(욥 1:6)과 ‘지혜’(약 1:5)와 ‘죄를 범하지 않게’(요일 5:16) 구하라는 것이다.

어떤 난관에 부딪혔을 때, ‘올바로 판단하여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소서’ 라고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서의 올바른 신앙 자세일 것이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자(왕상 3:9) 하나님은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도 주었다(왕상 3:13).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기도는 하지 않으면서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려준 십계명과 하나님과 이웃사랑을 새 계명으로 준 예수의 뜻과도 맞지 않는다. 성경은 자신의 욕망을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주고 있다(창 2:17).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좇아 행해야 한다. 그러면 육체의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갈 5:16). 먼저 심신을 닦고, 집안을 정제(整齊)한 다음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화롭게 해야 한다.

이웃과 하나님 나라 구하는 일이 급선무
기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가르쳐 왔다면 기복신앙은 한국교회에 발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교인이 많아도 기독정신이 살아있지 않다면 그런 것들은 파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예수는 지금도 기독교인들이 사념(邪念)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다(요 17:15).

기복신앙은 하나님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만을 이루려는 데서 불거진 잘못된 신앙체계다. 인류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이 세상은 금방 천국이 되고, 낙원이 될 것이다. 종교가 육적, 물질적, 자기중심적인 것들을 구하면 종교 본래의 이타적 사명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기복신앙은 마귀가 조장하고 있다(엡 2:2). 그래서 기복신앙은 위험하고, 자신을 파멸의 수렁으로 빠뜨릴 수 있다. 십자가의 길을 피하려고 그토록 하나님께 매달렸던 예수가 결국 그 쓴 잔을 마시고 만 것(마 27:46)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Posted by 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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